부천신문, 2020년도 역사달력 컬러화로 업그레이드 제작 배포

[부천신문] 부천신문(발행인 권순호)에서는 10여년 전부터 부천의 지명과 역사를 글과 그림으로 엮은 역사달력을 제작해 부천시청과, 시의회를 비롯한 관내 기관에 무료로 배포해 왔다.

역사달력은 부천시의 역사와 지명의 유래를 바탕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나눠 지역을 현재와 비교해서 볼 수 있도록 삽화를 곁들여 재미있게 만들었다.

권 발행인은 그동안 200회 가까이 '부천역사바로알기' 강의를 진행해 오는 동안 역사달력을 강의 자료로 활용해 왔으나 제작한지 10년이 넘어 현재 지명이 바뀐곳도 있어 수정작업을 하며 삽화에도 새롭게 변화를 줬다.

권순호 발행인은 "부천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부천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은 정주의식과 애향심의 시작으로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설명했다.

권순호 발행인은 그 자신이 18대째 부천에 살고 있는 토박이로써 빠르게 사라져가는 부천의 역사에 대해 시민들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 오랜기간 역사관련 연구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부천의 역사달력 이미지

▲ 부천의 역사 달력 _ 1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2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3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4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5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6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7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8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9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10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11월
▲ 부천의 역사 달력 _ 12월

 

▼ 다음은 권순호 발행인의 부천의 지명과 역사에 대한 연구 논문이다.

 

 

문화특별시 부천

부천의 지명과 역사에 대한 연구

 

 

 


         연 구 자   권    순    호
         주    소   경기 부천시 석천로184번길 28, 씨티원프라자3층 (중동)
         연 락 처    010 - 2102 - 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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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Ⅰ. 서론

Ⅱ. 본론 

1. 문화특별시 부천, 부천의 지명과 역사

2. 부천의 하천
 ① 굴포천 
 ② 베르네천 

3. 삶의 숨결이 흐르는 길목 – 부천의 실크로드

4. 부천의 산과 고개

5. 복사골 유래와 부천의 연혁 
 ① 약대ㆍ도당ㆍ삼정
 ② 원종ㆍ여월ㆍ작동 
 ③ 원미ㆍ춘의ㆍ조마루고개 
 ④ 진말ㆍ장말ㆍ벌말ㆍ먹적골 
 ⑤ 역곡 벌응절리ㆍ사래리ㆍ범박동 
 ⑥ 심곡동ㆍ깊은구지ㆍ송내동
 ⑦ 오정ㆍ오쇠동 

Ⅲ. 결론

Ⅳ.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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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부천향토사에 앞서 우리나라에 있는 지방향토사를 두루 섭렵해 온 과정에서 잘못된 해석 등 여러가지 오류가 많이 발생된 것을 보아왔다. 
그 중 지명에 따른 어원은 현대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해석과 원음의 변화 속에 그 음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잘못 전해져 내려온 것이 대다수이다. 옛 지명 변환이 다각도로 다뤄지지 못해 오류가 난무하는 해석을 지켜보다 보니 옛 지명의 현대어 변화는 역사와 언어가 결합돼 본래의 뜻을 담을 수 있도록 진행됐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 현대어와 옛 지명의 괴리감

지명 해석의 오류는 현대어로 변환할 당시 우리의 옛 지명을 언어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역사를 전공하는 역사가들, 우리나라 역사와 향토사를 두루 다루는 역사가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점을 그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다.
1962년경 우리나라 최초로 국어사전을 비롯한 표준어가 공표 됐다. 당시 표준화된 문자로 지명 또한 표준어로 전화시켜야 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부천의 지명과 옛 문자는 같은 지역임에도 고구려, 백제 등 여러나라에 거쳐 뺏고 빼앗기다 각기 다른 다양성 속에서 언어가 섞이고, 변화되어 이어져 내려오다 약 500여년이 넘은 지금 지명과 문자가 각 지역 사투리와도 병합되며 하나의 괴리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한 예로 인천과 부천지역 외에도 많이 쓰여 지고 있는 지명 중 '독쟁이 고개'가 있다. 
많은 향토사계에서 '독쟁이'란 뜻을 지금의 현대문자로서 풀이한 '독 굽는 마을'로 잘못 해석되어져 오고 있지만 독쟁이는 '독'이 아닌 '큰 덕(德)'자로 '덕재'가 원음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발음이 강음 사투리화 되어 독이 됐다. 
또한 '재'는 '고개 재(岾)'가 원음으로 순음화 현상으로 재가 쟁이가 된 것이다. 따라서 독쟁이는 '기다랗고 커다란 고개'를 뜻하는 언어로 조선시대 초 전형적인 사투리라고 볼 수 있다. 
지명을 현대언어로 풀다보면 이렇듯 지명과 언어의 괴리현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 다른 예로 강원도의 산이 우거져 있는 깊은 산속들을 들어가보면 절골이란 지명이 여럿 나온다. 
절골은 흔히들 '절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해석의 오류다. 구한말까지 절골이란 지명은 산이 험한 지역에서 쓰는 일종의 표지어로서 '낙석의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뜻을 품고 있다. 절골은 한자인 '절개 절'자와 ‘마을 골’로 풀어줘야 하지만 지금은 절골이란 한글로 표시가 되다 보니 표현의 오류가 발생되고 괴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60년대 초 표준어 발표와 함께 지명도 표준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해 현재 해석의 오류 등과 같은 이러한 문제점이 표출되고 있는 현실이다.

◆ 삼국시대 언어가 모두 나타나는 부천

우리나라는 크게 언어적인 분류로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로 분류하는 바 충청과 호남은 백제언어권, 강원도와 경상도는 신라 언어권, 한강 주변과 이북 지역은 고구려 언어권으로 분류가 된다. 
고구려 언어의 특징은 단음절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대표적으로 골(고을), 말(마을)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고 백제언어는 골을 고을로 말을 마을로 이음화, 삼음화로 쓰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 신라언어는 문자가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달이라는 문자가 앞에 있으면 산이 되고 끝에 있으면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삼국시대 때에는 서로 뺏고 뺏기는 정황속에서 부천은 같은 지역임에도 쓰는 언어나 지명이 뒤죽박죽 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나 언어학자들 조차도 이것을 제대로 분류하거나 향토지명사, 향토사학을 연구하는 책자를 볼 수 없을 정도다. 또 언어학적인 부분과 접목해 역사의 흐름속에서 성향을 분석한 향토사를 다루는 책자 또한 찾아보기가 힘들다.

필자는 역사와 언어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문서적과 각 전문교수진과 수 많은 서적을 섭렵하며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게 됐다. 
이에 부천지역이 고향인 필자는 부천내 지명을 하나, 하나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식이나 인식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부천 향토사를 공부하고 연구해온 자료를 토대로 부천의 향토사 알리기에 앞장섰고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대로 가감없는 향토사 집필에 이르렀다.

 

1. 부천의 지명과 역사

부천의 역사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휴모탁국'의 중심지인 부천은 지금의 원미구 약대동과 도당동, 오정구 내동, 삼정동에 자연부락 형태의 커다란 토성이 형성됐다. 
당시의 토성은 1950~60년대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공업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삼국시대 때 부천은 457년 동안 백제 땅에 속했다가 이후 77년간 고구려 영토로, 115년 동안은 신라의 땅으로 각각 속했을 정도로 영토 쟁탈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천(富川)'의 유래가 된 고구려의 지명 '주부토'군이 나당연합군으로 인해 통일신라 지역으로 바뀌면서 계양산과 삼정동을 가로질러 기다란 제방을 쌓으면 '장제'군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백제의 제방 공법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순수한 진흙과 나무만으로 그렇게 기다란 제방 공법을 통해 백제의 놀라운 토목공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제대로 알려면 '굴포천(屈浦川)'의 어원에서 찾는 게 바람직 할 것이다. 이유인즉슨, '굴(屈)'은 삼한시대 마한의 언어로 추정되며 '크고 깊은 포구'로 구한말까지 사용돼 왔다. 이후 1920년대 한강농지개량조합이 생기면서 농지개량사업으로 김포시 고촌과 서울 강서구 개화산 사이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에 에 제방을 쌓아 농지로 개간하여 부평과 부천을 경우, 한강에 이르는 커다란 천(川)이 형성돼 '굴포천'이 된 것이다.오늘날 사용하는 '부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3월 1일 경기도 부평군에서 부천군이 설치되면서 '부천'이라는 지명이 등장했다. 흔히들 '부천'의 지명이 부평군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자를 따서 '부천'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거나, 개천이 많아 개천(川)을 중심으로 부(富)가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부천'이라는 지명은 굴포천을 중심으로 '부(富)'를 형성하려는 '미래지향적인 행정 명칭'의 의미를 담고 탄생했다는 사실을 부천시민들이 안다면 '부천'이라는 지명이 무척 기분좋게 다가올 수 있고 '애향(愛鄕)부천'의 함축적인 의미까지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부(富)'가 흐르는 도시, 부천'은 앞으로 부천시민의 삶의 질 향상이 크게 향상될 때의 실현된다는 점에서 지하철 연장건설사업과 문화사업 등을 통해 부천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2. 부천의 하천

인천 산곡동에서 부평~부천~김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한강의 제1지류로 부천을 경유하는 길이만 2.6km에 달한다.

● 굴포천

'굴포'라는 어원에 대해 조선 중종때 삼남지방에서 바다로 이동하는 배가 강화 손돌목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아 이 뱃길을 피해 보다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하천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원학적인 지명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해석이라 하겠다.

'굴포천'을 언어학적으로 풀어보면, '굴포천'의 굴(屈)은 '굽을 굽'인데 실제로 꼬부라진 천이라서 굽을 '굽'을 쓴 것이 아니라 고구려시대 언어로 '굴'과 '걸', 즉 고구려 민속놀이 중 윷놀이의 '걸'과 같은 의미인 '대단히 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남 진도에 굴포가 있고 함경북도 응기에 굴포가 있는데, 모두가 '대단히 큰 포구'라는 뜻으로 천(川)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굴포'라는 개념은 '큰 포구'라는 의미와 더불어 '커다란 옹기식의 포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으로 말한다.

부천의 굴포천은 지금의 중ㆍ상동과 송내동 경인국도 아래, 그리고 부평지역으로 볼때는 계양산 동야리 입구까지이며, 원종동과 고강동, 오쇠동 사이 '방우리들'까지의 포구를 일컫으며, 이로 미뤄볼 때 한강 팔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는 서울 강남 압구정동이 조선시대 한명회가 정자를 지은 것에서 '압구정'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압구청'이라는 원뜻은 '압구지'로 '바다압자'와 구지는 움푹 튀어나온 것을 말하는 것을 삼국시대 백제어로 사용된 것이다.

지금의 한강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을 상기 할 때 굴포의 의미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부천의 '굴포'는 지형학적으로 밀물과 썰물이 굽어져 들어오는 형상을 한 큰 포구가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 베르네천

오정구 원종동에 위치해 있으며, 성곡시장과 동진아파트 사이에 흐르는 하천으로, 부천의 한 사학가는 임진왜란 당시 박진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큰 전투가 벌어져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피비릿내가 주위를 진동하여 '비릿내천'이라는 해석을 했다.

그러나 '베르네'의 어원을 살펴보면 북한 압록강쪽에서 비슷한 음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는데, 원음은 '비레이', 단음절로는 '빌'이라고도 불리웠고, 이후 중세에 와서 '비루' '비류' 또는 '베르네'라고도 불리웠는데, '큰 강이나 큰 개울에 붙은 곁가지 개울'을 뜻하니, 베르네천은 굴포에 연결되어지는 작은 개울을 뜻한다.

 

3. 삶의 숨결이 흐르는 길목 - 부천의 실크로드

- 5일장으로 가는 길목

서민들의 삼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5일장'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196년대까지 와성하게 이어져 왔으며, 1970년대 이후부터 도시화 바람에 차츰 밀려나 이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한적한 시골에서나 입에 오르내리는 말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 시흥 뱀내장터
시흥군 신천리(현 시흥시 신천동) 일대로 소래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뱀 모양이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안산과 인천, 광명, 안양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 5일장이었다. 뱀내장터를 찾은 사람들이 다음으로 찾은 5일장은 소새장터였다.

● 부천 소새장터
하우고개를 넘어 지금은 없어진 소사극장 앞(옛 깡시장, 현재 청과물시장 일대)일대에 섰던 5일장이었다.

소새장터를 찾은 사람들은 부천 땡땡이골목을 지나 원미구청 앞 벌막에 형성된 주막촌을 찾아 모여 들었다. 5일장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장돌뱅이'들이 자연스럽게 벌막 주막촌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주막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장돌뱅이들은 도당동~약대동~삼정동~대장동을 거쳐 인천 계양산 아래 부평도호부(현 계양구 계산동) 황어면에 형성된 황어장터로 모여들었다.

● 황어 장터
서울과 경인지역에서 가장 큰 5일장으로 '우시장'까지 열려 서울 영등포와 목동 일대 사람들까지 찾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김포 검단을 거쳐 김포읍의 '김포장터'로 또다시 향했다. 김포장터를 향하는 길목에는 마송장터와 통진장터 등 수시로 열리는 소규모 장터가 장돌뱅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들 장돌뱅이들이 김포장터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강화장터였다.

이처럼 시흥 뱀내장터~부천 소새장터~벌막 주막촌~인천과 김포의 황어장터와 김포장터~강화장터 등 5일장으로 따라 이어지는 길을 경기 서부지역일대 주민들의 생활상이 공존하며 각 마을의 경조사 등 각종 소식을 주고받는 요충지이자 이정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당시로 볼 때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는 거대한 물류기지의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라고 볼 수 있다.

 
4. 부천의 산과 고개

● 성주산
소사구 심곡본동 뒤쪽에 있는 성주산은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와우산'이라고도 하는 부천의 대표적인 산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는 부천에는 산이라고 명명할 만큼 높은 산이 없어 고작해야 '앞산', '뒷산'으로 불리워진 적도 있다고 한다.
심곡동에서 시흥시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우고개'는 예전에도 '마니고개'라고 했는데, 정명고등학교 앞 고개와 심곡동에서 송내동 넘어가는 큰 고개도 '마니고개'로 불리웠다고 한다.
 '마니고개'의 어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언어로 '마니'는 즉 두음절로 '말'이 되고, 양음절로는 '마이, 마니, 마리'라고도 쓰여졌는데 성주산의 옛지명은 '말뫼'로 강화도의 '마니산'이나 전주의 '마이산'과 같은 어원을 가진 지명이다. 
시경이나 서경에서 '말'은 '마가가 지배하는 지역'의 제후의 이름인 '마가'를 뜻하며 성스러운 지역이라고 한다.
 
● 거마산
소사구 송내동 부천남부경찰서 뒷산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비슷한 지명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삼한시대 이전과 이후의 시대적 상황과 어원학적으로 풀어보면 우선, 삼한시대 이전 해석으로는 부족장, 즉 제사장이 통치하던 시대를 뜻하는데 거마산의 '마'는 마씨(마왕)가 지배하는 지역 영역을 표기하는 지명이다. 
다음으로는 삼한시대이후 해석으로 '검산'이 원음인데 순음화 현상으로 인하여 '거마산'이 돼 본뜻은 웅대하고 신성한 지역을 말한다. 
국문학적으로 '검'과 '금'은 같이 쓰여지는데 인천시 부평의 '철마산'도 원래는 금마산(金馬山)'인데 '쇠 금(金)'을 '철'로 해석하여 '철마산'으로 사용하는데 잘못된 표기 지명이라 하겠다.

● 계양산
소사구 소사본3동에 위치하며 신앙촌을 감싸고 한신아파트 뒤에 있는 산으로 1950년대 말에 박태선 장로가 신앙촌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할미산은 산의 형태가 마치 '할머니의 구부린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신앙촌 재개발사업으로 인하여 현대홈타운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꼭대기만 겨우 산모양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 할미산
할미산의 고대 어원은 '마고산'이라 불리웠고 '마고산'의 고는 '할미 고(姑)로 한자의 음을 따온 지명인데 전설상의 어원으로는 '영동할멈'으로 '바람이 잦다'라는 표현이며 어원학설에서는 '노고'라고도 하는데 '찬바람이 많은 지역의 산'을 '할미산' 또는 '노고산'이라고 한다.

부평사에 의하면 고려말 조선초 부평 계양산에 올라 시를 쓴 내용 중 계양산이 ‘계양’이라는 지명으로 나옴으로 인해 계양산과 계양구이 ‘계양’이라는 지명이 탄생된 듯 하다. 계수나무 계(桂)와 많을 양(陽)으로 ‘계수나무가 많다’라는 뜻으로 문장 한 곁에 나온 것이 시초가 되어 계양산과 계양의 지명이 탄생한 것 같다. 
필자도 계수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하여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우리나라에는 토종 계수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귀하디 귀한 몸이다. 
도시 지역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경상도 지역 깊은 산속에 들어가야 한 두 그루 볼 정도로 대단히 귀하디 귀한 나무다. 
그렇다면 계수나무의 계가 아닌 지금의 계양산에서 부평, 중동, 상동을 내려다보았을 때 물이 많이 고여있는 형상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 돼 계수나무 계가 아닌 빗물 계가 맞지 않을까 추측해 봄이 옳지 않나 싶다. 
빗물이 많이 내려 고여 있는 지역을 시로서 표현 했던 바, 계수 나무 계가 아닌 빗물 계자가 거나  아니면 계수나무 계의 음을 풀 것이 아니라 제2의 음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이는 국문학과 언문학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 하우고개
부천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고개 중에 하우고개가 있다. 
고개 언덕이 가파르고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 ‘하우하우’ 소리를 낸다고 하여 하우고개라 불리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부천시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어느 분이 그냥 쉽게 표현 하다 보니 지금까지도 잘못된 해석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지명의 역사는 근거를 기준으로 제시해야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한번 잘못인식이 되어 지금까지 20~30년 동안 많은 시민들이 잘못된 지명인 줄 모르고 불리어져 온다는 것을 대단히 안타깝다고 할 수 있다.
부천지역 토박이들은 고개 명에 대해 거의 다 알정도로 하우고개는 16세기경 5일장 문화가 본격화 되면서 장과 장을 잇는 고개나 깊은 산속에서 주로 강도나 산적들이 출몰하였기에 주막집에나 지정된 장소에서 십 수명이 모아지면 넘는 고개라고 하여 화합할 화(和) 벗 우(友)를 써 화우고개가 원음이다.
뜻을 모르고 쉽게 불리어져 오다보니 화우고개가 하우고개로 변형되어 불리어진 듯싶다. 경기도 연천, 포천 장을 연결하는 거의 모든 깊은 고개에는 하우고개가 전국에 100여 곳도 넘기 때문이다. 
부천에도 뱀내 장터에서 소새5일장으로 넘는 거리가 험난하고 숲이 깊어 강도나 산적들이 주로 출몰하여 지금의 시흥에 있는 주막에 모여 고개를 넘었다 하여 화우고개라고 한다.

 

5. 복사골 유래와 부천의 연혁

● 복사골 유래
부천을 '복사골'이라고 할 정도로 부천의 대표적인 상징은 '복숭아'이다. 그러나 '복사골'은 아픈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천에서 '소사 복숭아'가 유명하게 된 것은 1903년 인천역장을 지낸 일본인 '다케하라'가 지금의 심곡본동에서 복숭아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복숭아 밭을 일구었고, 당시 부천지역 주민들이 그곳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했다.

오늘날에는 부천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오카야마시에서 매년 '모모타로'(복숭아 동자) 축제가 열리고, 부천시에서도 매년 5월 '복사골 예술제'를 열어 '복숭아'를 매개로 두 도시가 초청방문을 하며 우호증진과 교류협력을 하고 있다.

'모모타로'축제가 열리게 된 것은 '옛날 시냇가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데 커다란 복숭아가 떠 내려와서 이상하게 여긴 동네 아낙네들이 복숭아를 건져 올려 쪼개보니 어린동자(모모타로상)가 나왔고, 자라면서 영특하고 신묘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당시 일본 전역에서 성행하던 나쁜 도깨비들을 복숭아속에 집어넣어 멀리 던져버렸다'는 내용의 동요가 전해진데서 유래하고 있다고 한다.

 '복숭아 나무'가 우리나라에서 무당이 굿을 할 때 복숭아 나뭇가지로 귀신을 내쫓는데 쓰이고 있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신앙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설은 일본 역사학 교수인 마쓰부치씨의 의하면 북부여의(옛 백제 부족) 위라왕자 세력들이 삼국시대 때 백제로 합쳐지면서 갑자기 백제가 강대해졌다가 그 북부여의 일부 세력들이 오카야마로 진출하면서 그곳에 있던 토착세력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세력을 타파하기 위하여  모모타로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위라왕자의 세력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만들어진 동요이며 동시이기도한 모모타로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모모타로 축제다. 위라왕자는 일본에서 위 발음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오카야마에서는 으라라고 불리어진다고도 한다.

'복사골'의 유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지리에 보면 심천현(沈川縣)으로써 '복사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순수 고구려 언어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천'이라는 뜻이다. 부천에서 복숭아가 첫 재배되기 시작한 지금의 심곡본동이고, 1960년대에는 '소사 복숭아'가 전국의 특산물로 각광받으면서 경인선을 따라 '심곡천'(복사매)에 만개한 '복사꽃'이 일대장관을 이룬적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복사골'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면서 부천이 ‘복사골'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부천은 '복사골'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옛 '소사 복숭아'의 재배단지를 재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 부천의 연혁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 토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삼한시대 '우휴모탁국'의 왕도가 약대동 일대라는 추론도 가능하며, 고구려 지명인 '주부토'군이 백제어일 가능성이 높고, 주부토의 '토(吐)'는 유기음으로 '두나도'로, 충북 제천에 있는 큰 호수의 백제시대 지명이 '나토'에서 신라시대에는 '대제'로 바뀌어 지금의 '제천'으로 바뀐 점으로 미뤄볼 때 부천의 옛 지명인 '주부토'군이 신라시대 '장제'군으로 바뀐 것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바다를 막은 긴 제방을 뜻하는 방죽 '제(堤)'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인천 계양산 아래서부터 김포공항 공항동까지 제방이 연결돼 있었으며, 오정구 오정동에 위치한 부천시 하수종말처리장 뒤편을 '방죽들'이라 불린 것에서도 부천은 그 옛날 물과 제방과 깊은 관련이 있는 기름진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부천 상동신도시에 비록 인공하천이지만 '시민의 강(江)'이 아파트 단지 사이를 따라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것은 2천년 전 잊어버린 부천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부천시민 모두가 자연 하천으로 가꾸려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① 약대ㆍ도당ㆍ삼정

▷ 약대동
1973년 7월 1일 부천시 시승격이 되면서 김포군에 편입됐다가 1975년 10월 1일 부천시로 다시 편입된 후 1993년 2월 1일 3개구로 분할됨에 따라 원미구로 편입됐다. 
약대동의 지명은 다양한 설이 있는데, 부평군 상오정면 지역으로 약물터가 있어서 약대란 설과, '약대'라는 낙타와 비슷한 동물이 있었기 때문에 약대라는 설, 아주 오래 전에 주변지역이 약초가 많이 자생했기 때문에 약대라는 설 등이 있다. 
'약대'의 약(若)은 중극음으로 '웨'라는 발음이 나는데 어음으로 풀이하면 '위'나 '윗'이 된다. 따라서 '약대동'은 '산 위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약대동에 있는 안동네 뒷산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해골 동산'이라고도 하는데 언뜻 들으면 무덤이 많은 동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해골'이라는 고대어를 풀어보면 '해씨가 모여 사는 고을'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해(解)씨 성을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해씨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아들로, 임인년(기원전 19C)에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즉위한 유리왕의 성씨가 바로 해(解)씨였다는 점에서, 약대동은 삼국시대부터 해씨 성을 가진 왕족들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 도당동 
부천군 당시 '도당리'로 오정면에 속해 있었고, 도자기 또는 오기 굽는 굴과 벽돌공장도 있어서 '도당동'으로 불리었다고도 하며, 당집이 있어 '도당'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풀어보면 '도당'의 '도'는 질그릇 '도(陶)자로 고대언문학적으로 '그' 음이 나오고 '당'은 'ㅇ'음이 나와 '긍'이 되며, '긍'은 '크다'는 뜻의 '검'자와 같이 쓰며, 사마천의 사기나 후한서를 보면 요순시대 '요' 임금의 성씨가 '도당'이었다고 적혀 있듯이 '도당'은 삼국시대 이전에 사용된 언어로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전국 각지에 '도당'이란 지명이 20여개나 된다.

▷ 삼정동
1600년대 말부터 박씨 규정공파 후손 박선이 정착한 지역으로 마을에 3개의 우물(井)이 있어 '삼정동'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한자 '삼정(三井)'을 직역하면 3개의 우물이지만, 옛 지형을 찾아보면 또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부평에서 삼정동쪽으로 내려오는 큰 냇가(후에 굴포천이라 함)와 약대동 광택지라는 큰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작은 냇가, 삼정동 1구와 2구(옛 지명)사이의 냇가 등 3개의 냇가가 하나로 합쳐진 곳을 '삼정동'으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정동의 중심지는 지금의 공장지역으로 옛 지명은 '장승백이'로 고대 언어로는 '영승미'라 했고, 이후 장승이 세워져 있다고 하여 장승백이라고 불리워졌듯이, 삼한시대에 솟대와 장승백이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뤄볼 때 삼정동은 삼한시대부터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던 지역이라고 하겠다.


② 원종ㆍ여월ㆍ작동

▷ 원종동
정월 대보름 행사가 오정구 원종동은 춘의동 당아래 고개에서 바라볼 때 동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먼~마루'로 불리웠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는 '넓고 긴 언덕'을 뜻하는 '멘마루'로, 원미구청 옆 고개를 '조마루'라고 하듯이 삼한시대부터 사용한 지명으로, 한자 표기로 '멀 원(遠)', 마루 종(宗)'으로 '멀리 보이는 긴 언덕'이라는 1.1.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종동 주변지역에 '큰능골', '작은 능골', '능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지명은 왕이 죽으면 쓰는 무덤인 '릉(陵)'의 지명이라는 점에서 '먼마루'라는 원종동의 지명 유래는 유서 깊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 여월동 
여월동이란 지명 유래는 '달과 같이 마을이 형성 됐다'는 주장과 '비슷비슷한 산이 많다'는 뜻에서 '여월'이라고 불리워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고강동'과 '작동' 지역의 지명을 '검다래'(크고 작은 마을이 많은 산골마을)과 '고리울'(한울타리 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석하듯이, '여월동'은 같을 여(如)자를 써서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강동, 작동, 여월동'은 먼 옛날 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 '고리울 축제'나 '대동 우물제' 같은 행사도 한마을에서 이루어진 주민축제라고 하겠다.

▷ 작동(까치울)
여흥 민씨가 주성을 이루던 이곳은 '까지가 많아 까치울'이라 했으며 까치울을 한자로 표기하여 '작(鵲)동'이라 불린다. 그러나 예전에는 산골지역으로서 집과 집 사이가 50~100m가량 떨어져 있다 보니 '한 울(울타리)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고리울'이라 했는데, 어음변회를 가져오면서 고리울에서 '같은울→같이울→까치울'로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부평구 작전동에도 '까치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산골마을로서 까치 작자를 써서 '작전동'으로 불리우 듯이, 작동 까치울은 까치가 많아 까치울이 아닌 산골마을로 삼한시대 마한 언어로 고구려 때 주로 쓰여진 언어로 볼 수 있다.

▷ 곰달래길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지명으로, 오정구 고강동과 서울 신월동간의 경계를 '곰달래길'이라고 부른다. 부천지역에서 '곰달래'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내'로 해석하고, 서울 신월동에서는 '골짜기 사이에 흐르는 맑은 실개천에 투영되는 달그림자와 반짝 반짝 빛나는 달빛'이라고 해석하며 '곰달래 사랑'이라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곰달래'를 신라시대 어원으로 풀어보면, '곰달래'의 '곰'은 '크고 넓다'라는 뜻으로 원음은 '검'이며, '달'은 산이라는 뜻이고 '래(내)'는 천(川)을 뜻하므로, '곰달래'는 '큰 산 사이에 있는 내'라는 뜻이다.


③ 원미ㆍ춘의ㆍ조마루고개

▷ 원미ㆍ춘의동
역곡동 벌응절리와 같이 신라 경덕왕 이후 사용된 언어인 '겉절이'(절: 산모퉁이 우뚝내민 지역)는 '바깥지역'을 뜻하고 지형 지세를 보면 북쪽에서 넘어오는 찬바람을 막는 지형으로 포근1.1. 하고 따뜻한 지세를 이뤄 마을이 형성되기 좋은 곳이다. 
춘의동과 원미동의 지명에 대해서 지역사학가들은 한자 뜻 풀이로만 찾는 경우가 있지만 좀 색다른 해석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

현 부천중부경찰서 자리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어 장마가 지면 물이 넘쳐 다닐 수 없었을 정도였는데, 1980년경에 복개가 됐으며 '겉절이'는 일제때 일본어음으로 '표절리'로 바뀐 지명으로 '표절1리'는 북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지금의 '원미동'이었고, '표절2리'는 지금의 '춘의동' 지역이다.

춘의동 끝지점에 '당아래'가 있는데 원음은 '당하리'(당아리)로 큰모퉁이(원음 모랭이)가 나온 '도당'이 있는 아래쪽 마을을 뜻하기도 하다.

1998년에 작고한 이길파 선생(70, 전 동아일보 기자)는 1960년경 부천의 11개 지역의 온도를 측정한 결과, 춘의동 연초시험장이 있던 자리만 온도가 3~4℃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일제때 '양짓말(춘의동'에 연초시험장을 세운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여진다.

▷ 조마루 고개
원미동에 위치한 '조마루 고개'에 대해 향토사학자들 중에는 구한말 쓰여지던 조정리가 지명의 어원이라고 주장하는데, 달리 해석을 하고자 한다.

부천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언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언어, 통일신라시대 이후 사용된 언어ㆍ후삼국과 조선시대 사투리어까지 다양하게 분포돼 있던 곳으로 '조마루'는 삼한시대 마한언어라 할 수 있다.

'조마루'는 순수 가림토언어로 한자가 생기기 이전에 쓰여졌던 음성어로 문헌에 보면 옛 조상들이 목축생활을 하다가 정차고가 함께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곡식을 재배했고, 당시 가장 먼저 수확한 곡식이 '조'였다고 한다. 

또 '마루'는 높은 언덕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마루'는 '조가 많이 심어져 있는 언덕 위의 평야'를 지칭하는 순수 고어로 '조마루'는 고대 마한언어로 고구려 시대 때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조종리'를 아침 조(朝), 마루 종(宗)으로 쓰면서 조씨가 모여 사는 씨족마을이라는 주장은 조마루의 어원을 설명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④ 진말ㆍ장말ㆍ벌말ㆍ먹적골

▷ 진말
심곡동 부천예식장(중앙극장 뒷편) 부근을 '진말'이라 부르는데, 땅이 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동학전쟁 때 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진말'의 어원은 백제시대의 8대 성씨(국, 해, 진, 목, 백, 사, 연, 도) 중 진씨 성이 있는데 '진말'은 '진씨가 모여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부천에는 중동지역에 '목'저골, 심곡동에 '도'타골, 약대동에 '해'골동산, 약대동에 '목'시통(목씨가 만든 도로)이라는 옛 지명이 있는 것도 백제의 8대 성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필자가 일본을 방문하여 백제의 8대 성씨가 4자성어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백제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백제 성씨'를 연구하는 중요한 역사적 고증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 장말
원미구 중동 일부지역으로 예전에는 넓은 평야가 있던 지역인데, 일부에서는 덕수 장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장말'의 '장'은 중세 순수 우리언어인 '검'자의 중국식 표기음은 '장'이 된다. 따라서 '장말'은 '검말', 즉 '큰 마을'이라는 의미의 '긴 뚝'이 있어 마을 이름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벌막
'벌막'이나 '벌말'은 같은 뜻으로 '벌'(넓은 벌판) 가운데 있는 작은 동네라는 뜻인데 중국식 글자표기가 가미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때 주로 쓰여지던 언어인 것 같다. 
원미구 심곡1동 중앙초등학교와 원미구청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은 소새와 진말, 약대, 원종, 조마루길 등 부천의 각 지역을 연결하는 로타리 역할을 해왔으며, 여러 채의 주막이 있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였다.
'벌막'이란 한자식 표기음이고 '벌말'은 고구려 언어식 표기이다. 어원을 살펴보면 부평(뻘 위에 부(富)를 형성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지명) 평야를 예전에는 일명 '벌'이라고 했고, '막'은 중국식 글자표기법으로 지금도 중국에서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음으로는 '말'이 된다.


⑤ 역곡 벌응절리ㆍ사래리ㆍ범박동

▷ 역곡 벌응절리 
'벌응절리'와 '사래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겨난 마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경기도 광주군에서 선비가 현재의 역곡2동에 정착하면서 '선비가 온 마을'이라고 하여 '사래리(士來里)라 불리워졌고, '벌응절리'는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응(應)하여 '쳤기(벌ㆍ筏)'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 하는데, 다른 해석을 해볼까 한다.
'벌응절리'는 산모퉁이에 우뚝 내어지는 산등성이 중간 아래 능선 밭을 표시하는 지명으로 예전에는 전 지역이 80-90% 이상이 산림화되어 농민이나 화전민들이 가꿔놓은 밭을 지칭했다. '벌응절리'나 '사래리'는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에 쓰여지던 지명이라고 하겠다. 특히 대전시에는 '사래이'라는 언어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 독쟁이 고개
소사구 역곡동과 서울 오류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독을 굽는 가마가 고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한자 그대로 '독정현(篤亭峴)을 해석하여 '인정이 많은 정자가 있는 고개'라는 설이 있는데, 언어의 재구성 과정을 거쳐 그 뜻을 알아보면 '독쟁이'에서 '쟁이'라는 말은 중세 언어로 '고개라는 순수 우리말인데 고려시대 이전에 많이 쓰여지던 언어였다. 

'독쟁이'에서 '독'은 원음은 '독'이 아니고 '덕(德)'이다. 따라서 '독쟁이는 '덕쟁이'가 원음이며 '크고 긴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발음이 강음 사투리화 되어 '독쟁이'라 불리워진 것으로 보인다.

▷ 괴안동
부평군 당시에는 옥산면 괴안리였고, 부천군 당시에는 계남면에 속해 있었는데 원래 수백년 묵은 괴목(槐木)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괴안동의 '괴'자를 한자 그대로 풀어 쓴 것이라 하겠다.
삼국사기에 보면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이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잉근(仍斤)'은 '임금'을 뜻하듯이, 괴안동은 아주 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얀리'라고도 하는 것은 '괴'를 음성학적으로 재구성하면 '고얀리'가 되기 때문이다.

▷ 범박동
부평군 당시 옥산면 지역이었으며 부천군 당시에는 계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57년 신앙촌이 형성되기까지는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는데, 범박골은 범씨와 박씨가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거나 호랑이(범)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을 해보면 '범박골'의 '박'은 '밝고 넓다'라는 순수 고대언어로 '범'은 마을과 고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범'은 우리 고유의 순수 토템사상으로 크고 신성하다는 뜻으로 풀이되며, '골'은 '범'과 같이 '고을'이라는 뜻으로 중복됐는데, 언어배열로 보면 '박범'이 맞지만 어음이 어색하여 '범박'이 된 것 같다.


⑥ 심곡동ㆍ깊은구지ㆍ송내동

▷ 심곡동ㆍ깊은구지 
부천 남부역과 북부역 주변지역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심곡본동과 심곡본1동을 '깊은 구지'라고 하는데, 깊은구지는 백제어로 송내동 지명(구지리)처럼 쇠(金ㆍ옛 음은 '새'로 소쇠를 소새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을 뜻하는 언어로 사용해 왔으며, '심곡동'이라는 지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지리에 보면 '심천현(深川懸)'으로 '복사매'라고도 쓰여진다라는 구절이 있다. 
'복사매'는 순수 고구려 언어로 '복사'는 '숨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싶다'는 뜻이고 '매'는 '물' 즉 '천(川)'을 뜻하는 것으로 '깊은 천'(깊은 구지)을 의미해 '심곡'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송내동
고유 지명은 '솔안말'이라고 하는데 이 지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있어 바로 찾아보고자 한다. 
기원전 37년(갑신년)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부여의 주변국인 송양국을 얻어 고구려를 개국했는데 옛 부여의 송양국의 부족들이 송내동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솔안말'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천 연수동과 서울 영등포와 목동사이에도 '솔안말'이 있는데 송양국의 부족들이 여러 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지며, 송양국에서 '양'이 중국식 표기음으로 '안'이 돼 '솔안말'이라 불리 운 것 같다.
'구지리'라고도 하는 것은 송내동은 백제시대 때 영토로 '구지'는 백제시대 쓰여지던 중세언어로 쇠 '금(金)'을 뜻 한다. 일제 때는 구지1구, 구지2구로 나뉘어져 있다가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송내동으로 바뀌었다.

일설에 의하면 고주몽의 이복 형인 비류왕이 인천에 정착하려다가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아 부족을 이끌고 서울에 풍납토성으로 이동하여 백제의 온조왕과 합류하기 위해 이주하던 도중에 부족들이 인천 연수동과 논현동(옛 명칭은 '범아가리'로 포구를 뜻함), 송내동의 '한부족', 목동의 '솔안말' 등지로 흩어지면서 백제의 초기언어로 지명이 형성됐다는 주장도 있다.


⑦ 오정ㆍ오쇠동

▷ 오정동 
1992년 '오정'이라는 한자 지명이 오동나무 '오(梧)' 정자 '정(亭)'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오동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이를 이용해 정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를 두고 일제식 표기라는 지적과 함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따라서 '오정'이란 지명에 대해 좀 더 정확한 해석을 하자면, 먼저 '오정'이라는 지명은 '금골'이나 '검골'로 불리어져 왔으며 '아주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예로 '한밭→대전(大田), 소새→소사, 오제이→오정'으로 바뀐 사례를 볼 때 당시 지명을 편제한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한자나 언어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명은 한자의 음과 훈을 직역해서 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므로 역사학자들도 직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고 있다. 
'오정'의 경우에도 혹자들은 오정구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정(梧亭)이 됐다고 하지만 오정구에서 십 수대에 걸쳐 살아오면서 이 지역에 오동나무가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으며 혹자들이 얘기하는 오정(梧亭)이라면 서울의 오목교와 수원의 오정동, 오정교 등 '오정'이라 불리는 많은 지명도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정(吾丁)'이라는 지명은 중국 고시조에서 쓰여지는 언어이기도 한데, '나 오(吾)'와 '고무래 정(丁)'으로 표기될 때는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서 부른다'는 뜻이며, '크다, 웅대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부천의 오정 역시 중국식 표기원음은 '오재이'라 불리어져 왔고 일제 때부터 사용하던 오정(吾丁)을 보면 '나 오(吾), 고무래 정(丁)을 쓰고 있으며, 현재 바뀌어져 쓰고 있는 '오정(梧亭)' 보다는 예전에 쓰여지던 '오정(吾丁)'이 음운학적으로도 더 가깝다는 것이다.

▷ 오쇠동
옛날 이곳에 '쇠 노(弩)'를 만들던 5명이 도망을 와서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오쇠동의 북쪽은 강서구 공항동, 서쪽은 오곡동, 동쪽과 남쪽은 부천시 일부 경게 지역으로 오쇠동의 '오'는 다섯 오가 아닌 오정(吾丁)의 오를 써야 하고 '쇠'는 양음절로 쇄가 되며 ㅁ이 나오는데 '오쇠'는 '오금'으로도 바꿔 쓸 수 있다. 
또 금은 '검'과 같이 쓰여지는데 '아주 크고 광할한 지역'을 뜻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언어로 '쇄'라고도 한다.
오쇠동 주변에 있는 '방우리들'이란 지명에서 '방'은 '모 방(方)'자를 써서 '모우리들'이 '말동네'로 변했는데, 제방을 쌓아서 만든 지역이란 뜻이고 '뒷버들'은 오쇠동을 중앙으로 볼 때 뒤쪽에 있는 벌판을 뜻하고 '소머리골'이란 일명 '쇄기'라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 부천의 오쇠동과 서울 강서구 오쇠동은 같은 지역이 분할돼 있지만 한자표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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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향토사 소개를 마치며

 

필자는 부천이 고향이다. 
어릴 적 뛰어놀던 들녘은 사라지고 중동, 상동 신도시가 한창 조성되는 과정 속에서 부천의 급격한 팽창을 지켜봤다. 
구도심과 신도심권의 이질적인 면도 보았고 잊히고 사장되는 부천의 역사를 보며 그것들을 찾는 일에 조금이나마 일조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부천은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타 도시 어느 지자체 보다 많은 예산을 들여 6대 문화 사업을 중심으로 문화행사와 축제들을 하고 있는 실정을 보며 핵심 문화 사업에 지역 찾기가 없음이 참으로 아쉽다는 느낌이다. 
우리 부천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주부터, 조선시대 행정구역상의 부평군과 함께 기록에 나와 있으나 고강 선사유적의 발굴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기록상의 역사로는 조선시대에 오정구를 중심으로 한 문헌상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또 근대에 이르러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중심으로 부천의 지형도가 바뀌게 됨을 느끼게 한다.
최초 서울의 노량진(옛 이름: 노들역)에서 인천 제물포(옛 이름: 우각현)로 이어진 철도의 줌심적 위치에 부천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지역으로 오카야마현 출신의 역장이 부임하게 되면서 그곳(오카야마)의 지형, 기후가 거의 비슷한 여건을 감안하여 오카야마 특산물인 복숭아를 심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 지명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고 소사의 특산물로 소개되어 진다. 커다란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 언어인 ‘소사’(원음 소새)는 부천이라는 이름 이전의 대명사로 불렸으나 1973년 부천군의 시 승격과 함께 소사구로 행정구역이 나뉘게 된다.
우리 부천은 근현대사의 숨 가쁜 변혁의 과정 속에서 복숭아, 포도 과수원이 지천을 이루었던 조용한 전원마을이 신도시 개발과 함께 인구 100만을 내다보는 대도시로 전환되게 되었고 활발한 문화사업을 전개하는 활력 있는 도시로 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어느 지역보다 더 우리 부천은 이 고장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시민들이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역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학을 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주변 모든 분들은 우리지역의 역사문화가 없다고 탓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보고 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역사와 흔적들을 찾아내어 혼을 불어 넣어주고 윤택한 문화자산으로 정립시켜 나가주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감으로 확신한다. 
부천이 복사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내력과 이 고장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즐겨 사용했던, 그 이름이 가진 상징성을 찾아내고 미래를 연결하는 맥을 연계하여 부천의 새로운 Brad Name인 Fantasia Bucheon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당위성을 부여함이 우리의 과제로 판단되어 진다.
멀게는 고강 선사유적의 발굴과 함께 선사 문화의 유래를 찾고 청소년들의 문화 학습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각 처에 흩어져 있는 역사 문화를 집대성하여 시민적 공감대와 학습의 장을 마련하는 일 또한 우리들의 역할이라 생각되어 진다.

지금 생각으로는 작지만 그 의미가 클 수 있는 경인철도의 상징적 흔적들, 불과 1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있었던 부천역, 송내역 땡땡이 골목의 추억을 되살리며 도당동의 아기장수바위를 체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며 변종의 신도비와 한언묘비, 한준신도비, 민승 묘비, 풍양 조씨 묘비들의 역사적 맥락을 잡아주는 일 등은 부천의 역사적 유래를 찾는 중요한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국책사업으로 계획되고 있는 경인운하 개발이 구체화 되기 전에 대부뚝, 굴포천의 유래를 찾아내고 친환경 개발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물이 부족한 부천과 연계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는 노력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자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세계적 Brand로 각인 되어진 반도체의 시작이 부천이었다는 점(삼성 반도체), 파타스틱영화제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촬영소가 있었던 대장동(구 오쇠리의 우진필림-정진우 감독), 그리고 영화사(동아수출) 등 이것들의 자취를 밝혀냄과 옹기 도요지(여월동), 한국 근대 도자의 대표 Brand인 세라트(회사명), 도당 우물제, 농기고두마리, 활 명인 김박영씨, 대지의 작가이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 여사의 일대기 중 부천에서의 삶(심곡본동의 소사희망원) 속에서 보여준 봉사정신과 문학, 특히 구한말 한국을 소재로 쓴 소설(살아있는 갈대)에서 표현한 애정(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 등, 수많은 흔적을 찾아가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 된다.

지연적 상징성이나 역사유물이 부족하다고 탓 하지 말고 작은 흔적이나마 우리의 청년들에게 우리 고장의 인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작업은 학술적 연구와 함께 교육적으로 연계시켜 주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장소에 대한 추억은 오랜 기억으로 남아 다시 그 장소를 찾고 싶은 동기가 우리의 역사적 자취를 장소라는 공간적 위치 속에 연결하고 명소화하며, 다시 찾아가는 추억의 명소를 만드는 것은 백 마디의 말이나 구호보다 시민들의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며, 애향심을 높이고 나아가 살고 싶은 도시로 전환 되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며 지금 내가 부천의 지명과 역사를 찾고 자료화하고 있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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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참 고 문 헌

 

 

 


□ <위치시론> 논문 -------------------------------------------------------------- 이병도
□ <지명연구서설> --------------------------------------------------------------- 심여택
□ <지방행정 지명사> ------------------------------------------------ 내무부(국가기관) 
□ <한국의 지지편찬사> <한국지지> ------------------------------------------ 노도양
□ <우리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사전따로 말따로> ------------------- 배우리
□ <지명어의 소재와 그 유형에 관한 비교 연구> -----------------------------이돈주
□ <솟대와 장승과 동제> -------------------------------------------------------- 최인학
□ <전래 지명의 연구> ----------------------------------------------------------- 유재영
□ <국토개발과 지명의 신비> --------------------------------------------------- 김의원
□ <백제어 Ⅰ, Ⅱ, Ⅲ> ----------------------------------------- 백제문화 개발 연구원
□ <부평사> ------------------------------------------------------------------ 부평문화원
□ <부천시사> --------------------------------------------------------------- 부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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